[ 언젠가부터 가난이 보이지 않는다 ] 2024. 6. 2. 소금빵 #5
언젠가부터 주변에서 가난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학창시절에는 가난이나 불평등을 다룬 글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소설들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일제강점기 하층 빈민의 삶을 그린 '운수 좋은 날'이라든가, 극심한 가난 속 가족의 애환을 다룬 윤흥길의 '땔감' 같은 작품들이 있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의 나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가난과 불평등을 다룬 작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물어본다면, 선뜻 대답할 작품이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이 아니라 지난 몇 년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기생충' 정도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불평등에 대한 함의를 담고 있는 작품 정도로 확장한다면 '오징어 게임', '조커' 정도가 떠오르고 말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가난과 불평등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보다 사람들은 재테크, 결혼과 양육, 집값과 대출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개인의 성공, 좋은 직업, 자산가격의 상승 등등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삼기 시작한 우리 사회에서, 그 틈바구니 속에서, 빈곤에 대해 얘기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가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원래부터 조금은 불편한 일이었지만, '월에 얼마를 벌면 평타는 치니 마니' 같은 문제로 논쟁하는 요즘의 현실 속에서는 더더욱 꺼내기 어려운 얘기가 되었다.
'가난' 자체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서 가난'에 대한 담론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제 불평등 문제는 유행이 지난 담론인가?"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 트렌드는 SNS와 도파민, AI 발전과 산업구조, 환경과 지속가능성 같은 것들이다. 심지어 경제 분야에서도 불평등과 빈곤보다는 인플레이션과 통화정책, 국제정세와 세계 경제, 자유무역주의의 퇴보 같은 것들이 논의의 중심에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가 빈곤과 불평등에 무관심한 방향으로 바뀌어간 결과일까. 그것이 아니면 나와 내 주변의 문제일까. 사람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세상이라 믿고 살아가기 쉽다. 그렇기에 나 또한 당장 내 주변에 가난이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 사회가 불평등에 대한 담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운 좋게 특혜적인 조건 속에 놓인 채 나와 비슷한 삶의 궤도 위를 거쳐온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다 보니, 누군가의 빈곤을 외면한 채로도 아무 문제 없이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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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2학년 쯤 장애인 인권 문제에도 한창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 무렵 장애인 인권에 대해 나와 활발하게 의견을 공유하던, 스스로도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형이 한 명 있었다. 그 형은 나에게 "장애인은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를 자주 해줬다.
인구 통계학적으로 장애인 인구가 줄어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우리 사회의 장애인 인구 비율은 대강 어느 정도 정해져 있고, 그 사람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고독사나 높은 자살률, 사고사의 위험 등은 잠깐 제쳐두자.) 그럼에도 장애인들은 당장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주류라는 대열에서 이탈되기 너무나 쉽고, 우리 사회는 대열에서 한 번 이탈된 장애인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설계된 삶의 각 과업단계에서, 장애인들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실존적인 투쟁을 해나간다.
사회로부터의 이탈이 많이 일어나는 첫번째 단계가 학창시절이다. 나의 초중고 시절을 떠올려보면,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같은 학급에 장애인 친구가 한둘 정도는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같은 반에, 심지어 옆 반과 옆옆 반에도 장애인 친구는 없었다. 그 친구들은 전부 어디로 간 걸까.
최근 주호민씨와 관련된 사건으로 세간이 떠들썩했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주호민씨의 자녀인 자폐아동에게 온갖 폭력적이고 혐오적인 표현들을 쏟아냈다. 그 사람들의 세상에서 장애아동은 언제라도 무고하고 순진한 다른 아동들을 해칠 수 있는, 변태적이고 도착적인 성충동을 가진 짐승같은 존재로 이해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장애아동과 그들의 부모들은 그러한 공격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물러설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한다. 한발짝이라도 학교에서 물러나는 순간 장애아동은 영원히 주류 사회로, 즉 상위 학습기관, 직장, 지역공동체 등으로 다시 복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애아동과 그 학부모는 너무나 절실하다. 우리 사회의 가장 가장자리에 매달려 있는 이들에게 사람들이 인터넷 기사 댓글창에다 무참히 갈겨놓은 무책임한 편견의 말들은 너무 가혹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비장애인의 주변에는 장애인들 중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 부분을 끝끝내 놓치지 않고 버텨낸 소수만 남게 된다. 그 결과 가까운 장애인 지인이 있지 않는 이상,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주류 사회로부터 이탈된 장애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등등에 대해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당장 우리의 주변에서 보이지 않기에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려면 별도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이것을 뒤집어보면 장애인 문제가 그만큼 외면하기 쉬운 것이라는 의미도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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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도 우리 사회에서 이탈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나의 근처에 빈곤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손쉽게 외면해온 것일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주변의 환경 속에서 장애인의 존재가 사라져갈 때 장애인 문제는 외면하기 더 쉬워지듯이, 가난이 보이지 않는 나의 주변 환경 속에서 불평등의 문제를 손쉽게 외면해온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장애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장애인이 실제로 사라진 것이 아니듯, 빈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빈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빈곤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로 주변을 채워놓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쉽게 빈곤문제를 외면해온 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무관심, 게으름과 싸워야 한다. 빈곤과 불평등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옆구리에 끼워두자. 옆구리에 끼워 들고 다니기엔 너무 무겁다면, 언제든 다시 열어볼 수 있도록 책갈피 정도 살짝 끼워두자. 편안한 외면을 끝마치고 잠시 떠나왔던 불편함의 구역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