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와 듄2 ] 2024. 7. 27. 소금빵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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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 볼 만한 거 뭐 있노"
엄마가 카톡을 보냈다. 엄마랑 아빠, 누나, 그리고 내가 들어가 있는 가족 톡방이다. 이 톡방에서는 평소 출근은 잘 했는지, 저녁은 잘 챙겨먹었는지, 늦었는데 아직 안 자고 뭐하는지 같은 얘기들을 나눈다. 사실은 얘기라기보다는 엄마가 우리를 일방적으로 걱정하는 것에 가깝다.
나는 평소 영화관을 자주 가지는 않지만, 공교롭게도 한창 흥행하던 <파묘>와 <듄: 파트2>를 둘 다 영화관에서 봤던 터였다. 둘 중에 나의 픽은 단연 <듄: 파트2>였다. 압도적인 장면연출이나 강렬한 사운드, 가문들과 황제들 사이의 정치적 암투와 그 속에서 드러나는 베네 게세리트의 계략, 현대사회의 모습을 비춰주는 듯한 황폐한 환경과 한정된 자원, 윤리의 종말과 증오, 광신도들. 연출기술과 스토리, 그리고 메시지까지 어느 요소 하나 빠짐 없이 나의 기대를 아득히 넘어섰다. 전날 듄 1편을 보고 흥분에 차 영화 유튜버들의 세계관 설명 영상들까지 모조리 완독(?)하며 2편에 대한 기대를 머리끝까지 올려놓은 상황이었는데도, '행여나 너무 기대한 건 아니겠지' 하는 나의 걱정을 완전히 박살내버리는 영화였다.
(파묘도 재밌게 보기는 했다. 그런데 풍수지리와 파묘라는 참신한 오컬트 소재가 무색하게, 갑자기 민족주의와 또민식이 끼얹어져 익숙한 맛으로 돌아와버린 것이 너무 아쉬웠다. 마치 신선하고 희귀한 재료들을 진부한 조리법으로 망쳐버린 요리를 맛본 것 같았다.)
"듄2 재밌더라"
가족 톡방에다 카톡을 보낸다. 그런데 곧장 '음... 엄마가 듄2를 이해할 수 있으려나?' 생각이 든다. 엄마가 과연 '퀘사츠 헤더락'이니, '하코넨'이니 하며 빠르게 지나가는 외국말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과연 엄마가 가문들 간의 정치적인 암투와 섬세한 감정 묘사, 폴 아트레이디스(티모시 살라메)가 겪는 심적 갈등과 그의 결단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게다가 엄마는 듄 세계관을 알아보기는 커녕 듄1도 보지 않은 채 영화를 보러갈 게 뻔했다. 거기다 엄마의 평소 영화취향까지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엄마한테는 파묘가 나을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카톡을 보낸다.
"어 근데"
"엄마가 보기엔 파묘가 더 재밌겠다"
그런데 카톡을 보내자 마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꼭 이해해야 재밌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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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누나나 내가 이렇다 저렇다 설명해주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잘난 체 한다'며 탐탁지 않아한다. 보통의 부모와 자식 관계가 그러하듯, 이제 엄마보다는 변호사가 된 딸과 아들이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게 되는 단계에 슬슬 접어들고 있다. 그치만 엄마는 여전히 '글로만 세상을 배운 녀석들'보다는 당신이 피부로 익혀간 세상의 이치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공부만으로는 알 수 없는 지혜들을 엄마한테서 배우는 순간들도 있지만, 사실은 답답할 때가 더 많다. 특히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듣고 왔는지 갑자기 디톡스를 해줘야 한다느니 어떤 약(이라고 쓰지만 사실은 출처 모를 건강기능식품이다)이 몸에 쌓인 독소를 빼준다느니 하는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아 엄마!' '쫌!' 하는 말이 목젖 바로 아래까지 올라온다. '그건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저건 저렇다', '아무 말이나 믿지 마라', 설명해보지만 좀처럼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부모도 나이가 들면 아이처럼 된다던 말에 점점 설득이 되려고 한다.
그래도 엄마가 누나나 나에게 곧잘 물어보는 것들이 있다. 바로 '요즘 문물'에 관한 것들이다. 휴대폰 앱으로 배달음식을 시켜먹는다든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건을 주문한다든가, 카카오톡 알람이 안 울리면 어떻게 해야 한다든가 이런 것들 말이다. 엄마가 몸으로 부딪히며 쌓은, 피부로 익혀온 세상의 이치도 인터넷이라는 놈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모양이다. 그래서 배민으로 뭐 좀 시켜달라거나 인터넷으로 뭐 좀 주문해달라는 등등 엄마가 어려워하는 것들을 종종 부탁하곤 한다.
몇 년 전, 키오스크를 쓰기 어려워하는 어르신들에 대한 기획기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몇몇 프랜차이즈들이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점원들을 키오스크로 바꾸려고 하는데, 이게 어쩌면 노인들에 대한 사회적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당시 '이런 것도 노인에 대한 차별이 될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 이런 문제에 다시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지난 몇 년간 키오스크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들부터 골목에 있는 가게들까지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사이 우리 엄마는 노인의 문턱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엄마가 나이들어 가는 건 당연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겁나는 일임은 어쩔 수가 없다. 갈수록 엄마가 이해하기에 세상은 너무 빨리 바뀌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것들이 쏟아진다. 엄마의 부탁으로 배민 주문을 해줄 때에면 꼭 빠짐 없이 "엄마. 이번만 해주는 거고, 다음부터는 엄마가 직접 해보자", "담에 같이 있을 때 같이 주문 해보는 거다?" 하고 말을 덧붙인다. 한동안은 틈 날 때마다 "엄마, 블루링크 이거 엄청 편하대. 여름에 더운데 에어컨도 미리 켜둘 수 있고", "담에 나랑 블루링크 연결 한 번 같이 해보자"하고 말도 해보았다.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아~ 나는 그런 거 못한다"는 말만 무한반복한다. 내 걱정은 깊어진다. 우리 엄마가 키오스크 앞의 노인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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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해해야 재미있는 걸까?'
엄마한테는 <듄: 파트2>보다 <파묘>가 더 적합할 거라는 생각은 나의 오만에서 나올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엄마가 듄2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오만하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엄마가 이 영화의 많은 부분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은 아마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나의 오만은, 엄마에게 무엇이 재밌을지, 엄마가 무엇을 더 즐거워할지를 멋대로 단정해버리는 데에 있다.
물론 더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재밌겠지만, 그렇다고 꼭 이해해야만 재밌는 걸까. 영화를 재미있게 보기 위해 전부를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전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영화를 봐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배워가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마, 엄마가 좀 더 윤택하고 건강한 삶,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새로운 것들을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것들을 치열하게 배워나가고 제대로 이해해야만 삶의 순간들이 꼭 즐거워지는 것은 아닐 테다. 삶에 닥쳐올 새로운 것들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속에는 그것만의 행복과 보람이 있을 것이다. 길가에 핀 꽃과 햇볕을 피할 나무그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땅한 결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엄마가 이해하기 어려운 새로운 기술과 콘텐츠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고, 엄마는 갈수록 새로운 것을 배워하기 어려워하는 아이가 되어 간다. 어떻게 하면 엄마와 함께 요즘 문물에 대해 같이 배워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꼭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즐겁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나의 오만을 제쳐두고 엄마와 함께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 떠오르는 것은 여럿이지만 막상 엄마에게 잔소리하는 것 말고는 당장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들로서의 고민이 깊어진다. 우선은 내일 엄마한테 전화를 한 통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