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탐방-1 ] 2024. 8. 18. 호박
정현종 시인의 <섬>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거기에 얹어서 ‘섬과 사람들이 있는 세계’와 ‘섬에 가고 싶어 하는 나’의 상호작용을 현실의 나의 감각으로도 관찰해 본다. 그래야만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와 <섬>의 거리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놓인 ‘섬’은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때 그 사이에서 넘을 수 없는 혹은 넘어야 하는 장벽이다. 대화하는 사람들 사이에 수많은 섬이 있다면 이 사회는 ‘섬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타인과 피상적으로 소통하는 우리는 마치 부표처럼 어느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바다 위를 표류한다. 섬에 가기 매우 어렵거나 혹은 불가능하다면 동시에 왜 섬으로 가고 싶은 상태에 놓이는가? 우리는 섬이라는 공간에 도달할 수 없고 섬에서 만날 수 없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고향 상실증을 겪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섬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식의 근원에는 고향을 잃은(失鄕) 현대인들의 공허함과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갈망이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섬 그 자체가 된 사람들이 만나고자 할 때 ‘그 섬에 가고 싶은 마음’은 징검다리나 디딤돌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고 모두 그 존재하지 않는 곳에 가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섬은 실존하지 않는 허상이다. (1행은 사람들 사이에 사람들의 섬이 있다는 것으로, 2행은 섬이 된 사람들이 가고 싶은 ‘그 섬’이 존재한다는 해석이다.) 이때의 섬은 단절이다.
하지만 섬은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지기도 한다. 바다를 울타리로 본다면 섬은 닫힌 공간이지만, 바다를 나아갈 수 있는 길로 본다면 섬은 열린 공간이다. 사람이 오고가면 오히려 섬과 맞닿은 모든 곳이 길이다. 섬에 ‘가고 싶다’는 말이 섬에서 만나고 싶다는 것일 수도(도착지), 섬을 거쳐서 상대방에게 도달하고 싶다는 의미일 수도(경유지) 있다. 결국에는 저 섬 너머에 있는 사람과 가까워지고자 한다. 상대에게 도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시인은 <거울(현대시학, 1970)>에서 어떤 사물을 사랑하다 보면 그 사물과 나의 거울이 뒤바뀜을 이야기했다. 나와 사물은 서로 비밀이 없다. 각자의 가장 작은 소리가 서로의 거울에 비추어지며, 서로의 많고 끝없는 비밀을 공유하고, 거울을 통해 비밀이 없는 듯이 지내게 된다. 그렇게 ‘비밀이 없다는 것은 비밀의 많고 끝없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모든 감각으로 외부를 흡착하며 그렇게 사물을 사랑한다. 사물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물의 거울로 나를 본다. 우리의 거울이 밖으로 향할 때 그만큼 우리는 밖의 거울을 통해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와의 합일이 나에 대한 이해로 귀결된다면 섬 너머의 사람에게 도달하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실존을 위한 길과 중첩된다. ‘갈 수 없음’에 저항하는 ‘가고 싶은’ 인간은 (짧은 네 번의 노크 소리로 불행의 문을 두드리더라도) 섬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섬과 그 섬 너머를 사랑한다. 이때의 섬은 연결이다.
시인의 시가 현실에서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며 그의 시를 말장난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김치수 교수님의 말처럼 시인의 시는 사물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물과 사물 사이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나와 사물의 관계를 주의깊게 들여다볼 때 시인의 시세계가 이상으로 남지 않고 현실로 끌어내려진다. 이 시들의 마음은 솔직하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정의롭다. 빌어먹을, 나는 아마 시인이 보여주는 이 힘든 일상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시: 정현종, <섬(나는 별 아저씨,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