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3
담백한 표현들로 차근차근 풀어낸 글을 좋아하기에, 글을 쓸 때에도 이런 이상에 부합하는 글을 쓰기 위해 애를 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단어들을 가지고서 논리적 흐름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글을 쓰려고 한다. 그런데 문득, 이렇게 쓴 글이 재미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글의 소재가 재미없을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글의 구조가 너무 단조롭다거나 과하게 설명적이라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내 글이 재미없으면 어떡하지?’하는 걱정과 조바심도 있지만, 내 글이 독자들이 재밌고 흥미롭게 읽을 만한 글인지 아닌지 판단이 잘 안 설 때도 많다. 요리사들도 요리를 하면서 맛을 계속 보다보면 자기 음식이 맛있는지 맛없는지, 간이 센지 싱거운지 감을 못 잡는 경우가 많듯이 말이다.
반면, 툭툭 던지듯이 쓴 글, 무슨 의도로 어떤 의미를 담아 썼는지 유추하기 어려운 글들이 때론 더 사랑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 가끔은 아무렇게나 갈겨놓은, 고민도 뭣도 담겨 있지 않은 140자 짜리 글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말이다.
이런 불친절한 글들이 주목 받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글쓰기에도 일종의 밀당 같은 것이 필요한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보통 연인관계나 썸 단계에서 좋아하는 마음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면 상대방이 너무 쉽다고 생각하거나 금방 싫증을 내게 된다고 얘기들을 많이 한다. 그래서 일명 ‘밀당 신봉론자’들은 처음부터 바로 마음을 다 보여주어선 안 되고, 적당히 감정을 숨기면서 밀당을 해야 한다고 한다. 절대로 먼저 연락을 해선 안 되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무뚝뚝하고 차갑게 대해야 하고,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애매모호하게 행동해야 하고 ... 하는 식이다.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이런 ‘밀당신봉론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친절하고 세심하게 쓰인 글보다 대충 휘갈긴 불친절한 글이 더 사랑을 받는 것을 마주할 때면 독자와의 밀당 없이 너무 친절하기만 한 글은 밀고 당기는 쫄깃한 매력이 없는건가 하는 걱정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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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밀당의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일반에서도 불친절한 사람이 더 대접받고 친절하고 세심한 사람은 무시당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세심한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영화대사처럼 친절과 배려가 반복되다보면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이 고마운 줄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되레 그런 착한 사람에게 쉽게 질리거나 재미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반면, 신기하게도 망나니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좀 더 이해받는 경향이 있다. 그 사람의 단순하고 충동적인, 배려심 없는 행동들이 그 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낮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소한 배려만으로도 상대방의 낮아진 기대의 허들을 뛰어넘어서 감동을 줄 수 있다.
연예인으로 치면 박명수 같은 케이스다. 평소에 무심하고 호통치는 이미지가 있기에 웬만한 짜증을 내도 ‘박명수는 원래 그렇지’하고 넘아갈 수 있고 싸인을 친절하게 해줬다는 사소한 미담도 더 크게 느껴진다. 반면 유재석은 웬만한 미담은 미담으로 치지도 않는다. 기부를 해도 억 단위가 아니라면 유재석 치곤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반응이 나온다.
정치외교학이나 게임이론에도 ‘미치광이 전략’이라는 유사한 개념이 있다. 협상 상대방에게 자신이 비이성적인 존재, 일명 ‘미치광이’로 인식시킴으로써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는 전략을 말한다. 만약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면 충동적이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은 이를 비판하게 되지만, 반대로 비이성적인 미치광이에게 비판은 통하지 않는다. 이에 상대방은 이런 행동을 비판하기보다는 그에 춰서 ‘대응’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오히려 행여나 심기를 건드릴까 하는 걱정에 조심하게 된다. 여기서 ‘비이성’, ‘광기’를 ‘불친절’, ‘배려없음’으로 바꿔보면 이것이 위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불친절이나 배려 없는 태도를 비판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걔는 원래 좀 그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외교나 게임이론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주변 일상에서도 이런 사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평소에 다정하고 친절하던 애인에게는 100가지 중에 한 가지를 챙겨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정을 부리지만,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스타일의 애인이 생전 보여주지 않던 사소한 배려를 한 번 보여주기라도 하면 그게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다. 군대 선후임 관계도 마찬가지다. 선임 때부터 내려오던 부조리를 없애고 후임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후임들에게 만만한 사람 취급을 당하는 반면(일명 ‘후임한테 먹힌다’고 표현한다), 착한 선임을 무시하던 그 후임들은 자신들을 갈구고 가혹행위를 일삼던 선임에게는 아주 깍듯하게 행동한다.
인간관계의 양상이 이렇다는 것은, 친절하고 배려심 있게 행동하려는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다. 일견 사람들의 이중적인 태도나 일명 '강약약강'스러운 모습도 엿볼 수 있기에 단순한 억울함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일종의 부조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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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침착맨 유튜브, 일명 침튜브에서 흥미로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만약 자기가 운전하는 곳에는 항상 날씨가 좋아지는 초능력이 있다면 어떨까?’하는 상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선 이 능력을 이용해서 매일 화창한 햇살 아래 기분 좋게 운전을 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작스런 비 때문에 응원하던 야구팀이 간만의 승리를 날려버릴 위기가 찾아오자 침착맨은 야구장으로 차를 몰고 가서 비를 그치게 만든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사람들이 점점 능력의 존재를 알게 되고, 물난리가 났다 하면 ‘침착맨은 뭐하냐’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러한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고자 수해지역으로 차를 몰고 가 비를 그치게 만든다. 그러면서 침착맨은 점점 국민적 영웅이 되어 간다. 그런데 침착맨은 이런 게 전혀 전혀 좋은 일이 아니고, 오히려 위험한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의로운 사람’, ‘국민적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생기지만 그것은 사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만 높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때가 되면 길에 쓰레기 하나만 버려도 온갖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질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앞서 언급한 인간관계 양상을 관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서만 쓰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남에게 주는 피해는 신경쓰지 않고, 충동적이고 통제되지 않은 방법으로 그 능력을 쓰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 사람의 사소한 잘못들에 “쟤는 원래 그러니까 뭐 ...” 하고 반응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기자회견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 성소수자 혐오적인 단어를 쓰더라도 ‘트럼프는 원래 그렇지 뭐 ...’하고 많은 사람들이 넘겨버리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침착맨은 방송에서 종종 ‘시청자들의 기강을 잡는다’는 표현을 쓴다. 컨텐츠 소비자인 시청자들을 오히려 기강을 잡는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항상 시청자의 기대에 부응하고 그들의 니즈(needs)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면 언젠가부터 시청자들이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니 사전에 먼저 개차반 같은 행동을 해서 그 기대를 깎아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청자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행동을 침착맨이 하더라도, 예를 들어 시청자들은 재미없어 하지만 자기는 좋아하는 게임을 방송에서 한다든가, 자기만 관심 있는 지루한 얘기를 주구장창 늘어놓는 일이 있더라도, 시청자들로부터 “쟤는 원래 저러니까”하는 반응이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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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이런 인간관계 양상과 비슷할 때가 있다. 생각과 지식을 친절하게 전달하는 글, 독자를 배려하는 글을 쓰면 오히려 “저렇게 쓸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썼냐?”, “그것보다는 ~이 더 정확한 표현 아니냐?”하는 등 지적들이 날아와 꽂힌다. 우선 글이 이해하기 쉽고 의미가 명확하기에 독자로서도 뭔가를 지적하거나 비판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에서부터 ‘대화가 통할 것 같은 인상’, ‘비판이 먹힐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단정적인 어조에 추상적인 표현을 범벅해서 써놓은 글은 오히려 그럴듯해 보이는 경우가 있다. 가끔은 필자가 너무나 확신에 차 있어서, 나도 모르게 ‘내가 모르는 무슨 근거가 있겠지’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도리어 책임감 있는 독자라면 불친절한 글을 읽으며 “이렇게 말하는 건, 이런 저런 내용을 전제로 말한 거겠지?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니까.”하는 식으로 선해를 해주기도 한다. 논증이나 맥락에 빈틈이 있다면 그것을 독자가 나서서 그럴듯하게 메워서 이해해주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불친절은 침착맨의 ‘기강잡기’처럼 유리한 전략일 수 있다. 나의 전편 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우월전략’이다. 그런데 개개인들이 각자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를 선택하는 결과가 전체적으로는 최선이 아닐 때가 있는 것처럼, 모두가 불친절한 글쓰기라는 각자의 우월전략을 선택한 전체적인 결과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다. 불친절한 글쓰기는 단지 정확한 의미전달을 가로막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글을 쓰고 읽는 사람들 사이의, 크게 보면 우리 사회 전반의 불통을 심화시키는 주범이 되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단어들과 모호한 연결들로 의미의 공백, 흐름의 공백을 남겨둔 불친절한 글들에는 그만큼의 빈틈이 남아있게 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러한 글을 읽을 때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방식을 기초로 해서 그 빈틈 부분을 메워나가게 된다. 그렇기에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필자가 의도한 내용이나 '합리적인 해석방법을 동원한다면 마땅히 도달하게 되는 내용'으로부터 한참 멀어진 채 자신이 부여하고 싶은 의미대로 글이 쓰여있다고 믿어버리기도 한다. 즉 글의 빈틈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읽고 싶은 대로 글을 읽도록 한다**.
또한, 독자들 중에는 불친절한 글을 흔쾌히, 긍정적인 자세로 읽어주려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보통은 필자의 입장(주로 정치적인 입장)에 동의하냐 하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갈리는 것 같기는 하다.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먼저 발 벗고 나서서 글의 곳곳에 산재한 빈틈들을 메워주려고 노력하지만,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숨어 있는 맥락이나 의도를 읽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러한 글쓰기 방식, 즉 불친절하게 글을 쓰는 태도는 나로서 아주 못마땅하다. 친절하고 섬세하려고 노력하는 나의 글쓰기 방식이 쉽게 지적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 억울해서 심술이 난 것은 절대 아니다(맞다).
{** 적어도 그러할 위험을 증대시킨다. 이러한 위험을 적절히 허용함으로써 성립하는 대표적인 장르가 바로 시(詩)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불친절한 글'이라고 지칭되는 것에 '의도적으로 의미공백을 둠으로써 독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자 하는 글'은 포함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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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서 운전을 하다보면 정말 사려 깊고 배려심 있는 운전자들, 보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옆 차량 운전자가 편하게 타고 내리도록 벽으로 바짝 붙여서 주차를 해둔다든가, 우회전 상황에서 운전자와 보행자가 서로 먼저 가라고 양보하며 눈짓하는 상황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이런 상황들을 마주칠 때면 잠깐 스쳐가는 순간에도 괜히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도로에는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도 많고, 어떨 때는 그런 사람들이 더 배려를 받는 경우도 있다. 막무가내로 껴드는 운전자가 차선을 더 잘 끼어들게 되기도 하고, 어떤 짓을 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난폭운전차량들은 주변 차량들이 먼저 피해가면서 양보를 받기도 한다. 운전자 개개인으로서는 막무가내로 껴들기도 하고 예측하기 어렵게 난폭운전하는 것이 이득을 보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좋은 도로문화라고 할 수는 없다. 모두가 불친절하게 운전하는 도로에 차를 끌고 나가는 상상을 해보자면, 벌써부터 도로에 나가기 싫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무책임하고 망나니 같은 모습이 관계에서 이득을 보는 우월전략일 수 있어도 서로가 서로의 기대를 떨어뜨림으로써 이득을 보는 모습은 적어도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관계의 양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세심하게 배려하고, 내가 아끼는 누군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관계가 훨씬 건강하고 행복하게 느껴진다. 이는 글쓰기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에게는 서로의 정신을 이어줄 칼라의 연결 같은 것이 없다. 모두가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각자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언어를 통해 간헐적으로 소통하며 부분적으로나마 세계를 공유해나갈 뿐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인간들은 각자의 철탑에 갇혀 언어라는 수신호로 겨우 소통해나가는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외로운 운명에 처한 인간들에게, 친절하고 섬세한 글쓰기는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외로운 인간을 위해 짊어져야 할 일종의 책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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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친절하고 섬세한 글쓰기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커다란 숙제가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재밌는 글을 쓸까’ 하는 고민에 대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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