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라이온즈의 오랜 팬으로서 꾸준히 응원해오고 있는 선수가 있다. 바로 '김헌곤' 선수다. 해맑은 미소와 정직한 태도에서 느껴지는 긍정적이고 밝은 기운이 특히 매력적이다. 다른 선수들이라면 진작에 아웃을 예상하고 터벅터벅 걸어갈 만한 땅볼에도 1루까지 이를 악물고 전력질주하는 모습은 나를 팬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린 시절에도 다른 선수들보다 양준혁을 유독 좋아했던 걸 떠올려보면 아마 나는 최선을 다하고 정직하게 노력을 다하는, 그런 긍정적인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선수들을 늘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작년까지만 해도 김헌곤 선수에게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었다. 바로 "눈먼곤"이라는 별명이다. 선구안이 좋지 못해 나쁜 공에 배트가 나가고, 결국 그렇게 만들어진 평범한 땅볼이 자주 병살타로 이어지는 모습에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렇게 자주 쓰이던 별명은 아니었지만 김헌곤 선수가 2022년부터 심한 타격 슬럼프에 빠지자 이 별명은 김헌곤의 대표적인 별명으로 자리잡았다. 다행히 2024 시즌에 들어서는 김헌곤 선수가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면서 '눈먼곤'이라는 별명은 사그라들었다. 대신 여기서 파생된, 호들갑을 떨면서 칭찬하는 온갖 다른 별명들이 자리를 잡았다. 예를 들어 '몽골곤', '제임스웹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선구안이 나쁜 선수를 장난스럽게 놀리겠다는 팬들의 의도는 알겠다만 "눈먼곤"이라는 표현은 정말 '뜨악'스러운 별명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유럽에서 스포츠 선수를 이런 별명으로 부르려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비판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표현에 크게 민감하지 않은 듯하다. 이러한 표현이라 함은, 간단하게 말하면 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이고, 상세히 풀어보자면 '어떤 것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표현을 하기 위해 그와 일부 유사성이 발견되는 소수자의 특징을 가져다가 빗대어 표현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와 유사한 대표적인 표현들로 "병신", "결정장애" 등이 있다.
대학교에 갓 들어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인권문제에 유독 관심이 많던 2학년 선배들과 20살 동기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러한 표현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얼마나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지에 대해 자주 떠들곤 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러한 담론은 나에게 꽤나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태어나서 약 19년 가량을 입에 달듯이 써온 "병신", "(비하의 의미로 쓰이는)장애인" 같은 표현을 하룻밤만에 떨어내는 건 어려웠지만, 6개월, 1년, 3년, ... 고민과 실천의 시간이 쌓이며 이런 단어들을 나의 언어습관 울타리 밖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들에 의도치 않게 자주 노출되고 난 후에는, 울타리 밖으로 쫓겨났던 그 단어들이 다시 울타리를 넘어들어올 기회를 노리기라도 하듯 밖에서 안쪽을 힐끗힐끗 쳐다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와 혐오의 문제에 대해 거듭 곱씹으며 고민해보며 느낀 건, 무언가를 다른 어떤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은 인간 언어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특히 표현하고 싶은 것이 추상적인 개념인 경우 우리가 직접 감각할 수 있거나 경험하는 어떤 사물이나 존재로 빗대어서 표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시각 자극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주류로 자리잡은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 또는 태도'라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관점', '시각'이라는 단어를 빌려온다. '어떤 입장이나 태도로 이런 문제를 이해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면 "어떤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시죠?"하고 물어보는 식이다.
(물론 언어생활의 본질적 양상이 이렇다고 하여 혐오표현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식의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언어사용이 규범적 가치 여하를 떠나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좀 더 쉬운 무언가에 빗대어서 표현하려는 본질적인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려는 성질이 있다는 설명에서부터 '흐르려는 물을 가둬서 흐르지 못하도록 해선 안 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확장시켜나가다보면, 어떤 표현이 소수자를 평가절하하거나 배제하는 형태의 비유가 포함되어 있는 표현인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여부는, 0과 1의 바이너리(binary) 형태가 아니라 일종의 스펙트럼(spectrum)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걸 자연스레 확인하게 된다. 우선 1에 가까운 곳 부근에는 "병신", "장애인" 같은 가장 심각한 형태의 혐오표현들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1에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보다 조금 덜 문제적인 표현들이 위치해 있다. 강한 비하보다는 단순한 배제에 그친다든가, 어떤 특성을 소수자성과 연결짓는 강도가 약하다든가, 비유에 동원되는 단어가 소수자 배제적인 어원으로부터 이미 많이 멀어졌다든가 하는 경우들이다. 예를 들어, "지랄", "염병", "찐따", "맹목적인" 같은 것들이 그렇다.
(참고로, "지랄"은 과거에 간질발작을 일컫는 단어였고, 누군가 난리를 피우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간질발작에 빗대어 표현하며 이와 같은 의미로 자리잡은 것이다. "찐따"는 절름발이를 가리키는 일본어에서 온 표현으로, 의견은 분분하나 소아마비 환자 등 걸음이 어려운 사람을 조롱하는 표현에 그 어원이 있다는 설명과 전쟁에서 지뢰 등으로 한 쪽 다리를 잃은 군인을 조롱하는 데 쓰인 표현에서 어원이 있다는 설명 있다. 물론 단어의 어원에 관한 설명은 정확치 않을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믿을 수 있는 자료를 찾아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안 괜찮고, 어디부터는 괜찮은가. 물론 '개인적으로' 어떤 단어들은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어떤 단어들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지에 관하여는 어렵지 않게 얘기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숫자 1에 가까운 명백한 혐오표현과, 그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소수자 혐오적인 관념이나 문화에 어원을 두고 있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언어라는 것은 소통의 수단으로서 사회 구성원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규범적 도구이기에, 특정 소수자에 대한 조롱과 비하가 섞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들 소수자들을 사회의 연결로부터 끊어내는 것일 수 있다.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표현들은 일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수자들에게 무례한 표현이자 그러한 언어와 화해하며 살아갈 수 없는 그들을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도 마냥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숫자가 0에 가까워갈수록 문제는 어려워진다. 위에서 언급한 '관점', '시각' 같은 단어들은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내가 어떤 시각장애인에게 의견을 물으며 '어떤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계신가요?'하고 묻는다면 이는 아마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적절하지 않은 세부적인 이유나 감각까지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그래서 어느샌가부터 '보다', '바라보다'라는 단어 대신 '파악하다', '이해하다' 같은 단어를 쓰려고 하고, '관점', '시각'보다는 '입장', '태도' 같은 단어를 쓰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논리적 하자가 있다. 어원으로부터 정말 많이 떨어져나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파악"은 잡을 파(把), 쥘 악(握)로 이루어진 단어로서 손으로 뭔가를 쥔다는 데에 어원이 있고, "입장"은 어딘가에 '서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표현들은 손의 사용이 어렵거나 서 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표현인가? 한 술 더 떠서 '이해하다'는 표현은 배제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까? 이해능력이 부족한 지적장애인을 배제하는 단어는 아닌가? 그래서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에서부터 안 괜찮은가.
하물며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입장(!) 정립도 쉽지 않은 마당에,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까지 안 괜찮은가'에 관하여 다른 존재들과 합의를 만들어가는 건 더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도달한 합의점이 고작 "1에 가까운 심각한 혐오표현은 되도록 사용하지 말자"는 정도의 보수적인 결론에 그칠지도 모른다. 아직도 누군가는 '왜 말도 못 하게 하냐'며 빈정 섞인 짜증을 내기도 하고, 누군가는 '병신' 한 마디 쓰고 안 쓰고가 뭐가 중요하냐고 얘기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구체적인 기준이 세워져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일응의, 대강의 기준을 설정하고 그 기준에 대해 고민해가는 과정 자체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나도 모를 변화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있다. 왜 변화가 있을 거라고 믿는지 딱 부러지는 근거는 대기는 어렵지만, 아직까지 나는 사람들의 선의와 양심,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긍정적인 에너지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김헌곤 선수의 해맑은 미소와 정직하게 노력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그런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 말이다.
사진 출처:
스포츠조선, "[포토] 역전 투런포 이재현, 활짝 웃는 김헌곤"
https://www.chosun.com/sports/sports_photo/2022/05/22/VFZ3D53VODNKLG5QKPEZAWKF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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