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이 많은 날엔 몸이 무겁고 찌뿌둥한 느낌이 든다. 잠을 충분히 자고 밥도 잘 챙겨 먹어도 그런 걸 보면 체력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아마 이 많은 일을 해낸 후에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목적지가 분명하고, 가는 길이 짧을수록 발걸음은 경쾌해지는 법이니까. 앞으로 올바르게 나아가려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그 길을 계속해서 의심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 의심마저도 올바른 의심인지를 다시 의심한다. 아직 삶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시절일 때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마음에 목적지와 방향에 대한 불안을 떨치기 어렵다.
어깨 위에 막연히 있다고 생각하던 무게를 실제로 느끼는 날이 있다. 물 먹은 솜처럼 정말 몸이 무거워지는 날, 비가 내리는 아침이다. 문을 열고 나서서 우산을 펴고 물웅덩이를 피해서 땅에 발을 내딛는다. 몸은 평소와 다른 공기를 헤치고 나아간다. 우산에 메인 나의 두 팔이 중심을 잡기 위해 애를 쓴다. 하늘의 체중을 견디는 폴리에스테르 지붕의 살대를 쳐다보면 그 밖으로 흐린 물빛의 세상이 보인다. 그리고 소월의 <왕십리>가 떠오른다.
<왕십리>는 구체적 지명일 수도 있지만 ‘십리를 가고 또 간다’의 왕(往) 십리이기도 하다. 길을 걸으면서 눈을 돌려 보이는 모든 곳에 비가 온다. 십리를 걷고 또 걸어도 비가 멈추지 않는다. 그런 세상을 보면서 나는 ‘그 비 참 시원하게 오는구나!’라며 감탄하거나, ‘이 비 멈추지 않는구나!’라며 탄식한다. 그리고는 비가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①이왕 비가 올 것이면 오는 둥 마는 둥 내리지 말고 모름지기 시원하게 5일쯤 내리면 좋겠다는 것일 수도 있고, ②5일 정도 왔으면 이제 충분하고 그만 올 때도 되었다는 의미일수도 있다. 첫 번째 해석은 우리나라의 기후를 생각하면 다소 우습기도 하다. 6일 이상 비가 온다면 장마라고 해도 과한 편이니 두 번째 의미가 보다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니 화자는 며칠 내내 비가 오는 것을 지켜보다 이제는 비가 멈출 때가 되지 않았는지 생각하고 있다.
그 후에 만나는 2연은 처음에는 의미가 아리송하다. 김소월의 다른 시들이 해석이 상대적으로 분명한 데에 비하여 <왕십리>는 해석이 모호하다는 평을 받는데 그 원인이 주로 2연에 있다. ‘여드레 스무날’에는 오고, ‘초하루 삭망’에는 간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1)누가, 2)정확히 얼마의 기간 동안 오고 가는가(3)과연 왔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가능한 주어는 ①1연에서 계속 온다고 이야기한 비이거나 ②혹은 내가 있는 곳으로 오기로 약속한 사람이다. ‘여드레 스무날’은 8일, 20일을 나열한 것이니 이것을 음력 28일이라고 해 보자. ‘초하루’는 매달 첫째 날, ‘삭망’은 삭일(매달 1일)과 망일(매달 15일)을 아울러 의미한다. 그러니까 일단 달은 알 수 없지만 음력으로 ‘28일’에 와서 ‘1일, 혹은 1일/15일’에 간다고 했다(1일에 의미 중복이 있다). ①오는 것이 비라고 해 보자. 음력 5월 28일(스무여드레)이 대략 양력 7월 3일이고, 음력 7일 1일(초하루, 삭일)이 양력 8월 4일쯤이다. 여름 장마철이 이쯤이다. 이 해석대로면 2연은 비가 7월 초부터 8월 초중순까지 왔다가 가고, 화자는 비가 오는 장마철에 그 비를 맞으면서 걷고 또 걷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②누군가 오기로 한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는 음력으로 28일쯤 왔다가 1일이나 15일쯤에 떠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 옆에서 머무르는 기간은 짧으면 3일, 길어도 2주 내외다. 기간에 대해서 앞의 장마기간의 해석을 빌려오고 주체를 ‘님’으로 바꾸면, 임은 장마가 시작될 때쯤 왔다가 장마가 끝날 때쯤 떠나기로 약속했었다. 왕십리에는 닷새 동안 비가 왔는데 임은 여전히 온‘다고 하고’, 간‘다고 한다.’ 오고 간다고 말한 사람이 있을 뿐 오고 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이때의 해석을 따르면 사람은 오지 않고서 임을 데려오지 않은 비만 눈물처럼 내린다.
한편 ‘여드레 스무날’과 ‘초하루 삭망’이 바닷가 주변에서 조수간만의 차를 이야기하는 ‘사리’와 ‘조금’을 뜻한다는 해석이 있다. 바다의 파도는 지구와 달이 서로를 잡아당기는 인력에 의해 생긴다. 지구와 달, 태양의 거리에 따라 밀물과 썰물이 높이를 달리 한다. 달과 지구와 태양이 일직선이 되는 망일(15일)과 삭일(1일)에는 달과 태양의 힘이 동시에 작용하여 해수면이 가장 높아지고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크다. 이 음력 보름(15일)과 그믐(30일≒1일)을 가리켜서 ‘사리’라고 한다. ‘조금’은 사리와 반대로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적은 때를 의미한다. 음력 8일이나 23일이 조금이다. 조금에서 7일 정도 지나면 사리가 시작되고, 사리에서 다시 7일 즈음 지나면 조금이 반복된다. 망일과 삭일을 합친 사리가 ‘초하루 삭망’이고, 음력 8일이나 23일 즈음인 조금이 ‘여드레 스무날’이다. 말의 순서를 따져 보면 앞서 ‘여드레 스무날’을 해석할 때 순서를 바꾸어 ‘28일’을 만든 것보다 ‘여드레’는 음력 8일, ‘스무날’은 음력 23일을 의미한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23일’이 ‘스무서른날’이 아니라 ‘스무날’이 된 것은 소월시적 특성을 감안하여 운율을 맞추기 위한 탈락이라고 해 보자. 아무쪼록 이 해석에 따르면 조금과 사리 때의 날씨에 맞게 비도 조금 때에 오기 시작하고 삭망 때 쯤 멈추어야 했는데 ‘여드레 스무날’인 ‘조금’이 지나고 ‘초하루 삭망’인 ‘사리’가 지나도 비가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김소월의 시에는 시적 세상을 운치 있게 만드는 사물이 등장한다. <산유화>의 ‘작은 새’가 세상을 관조한다면, <왕십리>의 ‘벌새’는 비가 오는 중에 나른한 울음을 운다. 가늘고 긴 ‘실버들’도 비를 맞아 늘어진다. 가볍게 날개를 떨치고 날아오를 작은 새와 여린 바람에도 흔들릴 실낱같은 버들이 비에 그 무게를 찾아간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사물들조차 그러하다. 구름도 비를 내리다 못해 지쳐서 산 위에 걸터앉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울음을 우니 비는 그칠 기미가 없어 보인다. 비가 멈추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희망을 찾기 어려운 세상이다.
‘갈래 갈래 갈린 길/길이라도/내가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김소월, <길>)’의 길은 눈앞에 있는 길 중 내가 가야 할 길이 없다는 절망이었다. <왕십리>의 길은 가더라도 어딘가로 도달할 수 없어 사실은 멈춘 것과 다르지 않은 길이라는 막막함이다. 마치 바닥이 회전할 뿐 나의 위치는 그대로 비가 오는 원점에 고정되어 있는 모양이다. 할 일이 많아 마음이 답답한 날이면 십리를 가고 또 가야 하는 길이 떠오른다. 분명 내 눈앞에 비가 오지 않고, 나는 앞으로 걸어가고 있지만, 눈앞에 보이는 날씨와 지금 걷고 있는 길을 다시 의심해 본다.
<왕십리>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그것은 읽는 사람의 몫이다. 한결같이 ‘온다/오누나/오는’ 비와 계속 걸어갈 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시: 김소월, <왕십리(신천지,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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