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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글 2024/호박 2024

[ 요즘 만화 ] 2024. 5. 19. 호박

 

  2022년 네이버 최수연 대표가 자회사 중 네이버웹툰의 미국 IPO 도전을 공식화한 후 네이버웹툰은 지속적으로 미국 기업공개를 위해 치밀한 도전을 이어오고 있다. IPO란 비상장기업이 상장하기 전 비공개였던 회사 구조를 공개하고 처음으로 공개 시장에서 일반인에게 주식을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상장을 위해 회계감사, 기업실사, 상장예비심사, 공모 등의 과정을 거쳐 IPO에 나서는 기업의 규모와 자본에 따라 상장에 성공하고 증시에 새로 입성할 수 있을지 여부가 결정된다.

 

  이러한 네이버의 도전은 네이버웹툰이 네이버 자회사 중에서도 손꼽히게 수익성이 좋은 사업이라는 점에 기반한다. 美 IPO와 함께 미국시장 진출을 위해 최근 네이버웹툰은 한국에서 자리잡은 수익모델을 기반으로 꾸준히 흑자를 내서 다시 일본, 미국 등 해외시장으로 투자를 시도하고 있다. 화면을 스크롤해서 보는 웹툰 개념이 생소한 해외는 인력 채용, 마케팅비 등 초기 영업비용이 생각보다 큰 규모로 들어가고 있고, 이로 인하여 매년 100-200억대 적자를 내고 있으나 네이버는 해외 웹툰시장 선두주자로서 부담하는 소위 계획된 적자라는 입장으로 앞으로도 일정 수준의 적자를 견디겠다고 한다. 해외시장 개척을 계속 시도하는 것은 그만큼 이 시장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이다. 영상화가 용이한 웹툰의 지식재산권 가치가 높아지는 시대에 네이버가 생각하는 미래 성장동력 중 하나가 컨텐츠 산업이라면, 그 실질이 기대에 마땅히 부응하는지 궁금해진다.

 

  네이버웹툰은 국내 경쟁사인 카카오페이지에 비해 가벼운 일상 장르에 강하고 스타 만화가를 다수 보유하였다는 특징이 있었다. 반면 카카오페이지가 기존에는 ‘로맨스 판타지’ 장르를 주도하고 있었다면 최근 네이버웹툰도 ‘로판’에 뛰어들었다. 이제는 인기 있다는 말이 한 발 늦었을 정도로 로판은 하나의 장르가 되어가는 중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1)현대 동양풍이 아닌 시공간적 배경에서 2)신분제 사회를 사는 3)여성 주인공 서사를 다루는 한국식 판타지다. 현재 네이버웹툰에서 가장 많은 장르태그는 완결작과 연재작을 포함해 총 780개가 검색되는 #로맨스일 것이고, 그 다음은 478개가 검색되는 #판타지다. 이중 #로판 태그로 87개의 작품이 검색된다는 점은, 보다 오래되고 대중적인 장르인 학원로맨스(79개), 무협/사극(61개)에 비하여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중요도로 해당 장르의 작품이 국내 대표 웹툰 플랫폼에 게시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로판 장르가 표상하는 내러티브는 과연 어떤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는가? 좋아하는 작품의 주인공은 나와 동일시되기에 그 성공의 플롯이 현재의 내면에서 가장 갈구하는 내러티브다. 허구의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는 결핍을 해소하는 기제다. 초면에도 쉽게 밝힐 수 있는 대중적인 취향보다 평소에 혼자 있을 때 조용히 보며 ‘힐링’하는 서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누군가의 ‘최애작’은 그 사람에 대하여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알려 준다. 소위 ‘A가 ~할 때까지 이 작품 본다’는 생각이 내면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로판 가족 서사는 여성 인물이 하나로 집중된다. 엄마가 있으면 딸이 없고, 딸이 있으면 엄마가 없는 경우다. 보통 서양 중세 또는 근대를 배경으로 하므로 공고한 가부장제에 따라 전(前) 권력자와 후(後) 권력자를 모두 포섭하여야 완벽한 지위가 보장되기 때문에 가족 내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인물이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내러티브적 조치이다. 동성의 가족 구성원을 배제하는 특성은 융의 관점에서 엘렉트라 콤플렉스고, 프로이트라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주로 딸-남성 형제 및 아버지, 아내-아들 및 남편이라는 가족관계적 명칭을 중심으로 작품이 구성되고 남성인물의 인정을 받아 생존하는 것이 여성인물의 목표 중 하나가 된다.

 

  로판 내 지위쟁취형 여성주인공 서사는 종종 회귀 또는 빙의 특성과 맞물려 나타나는데 이는 주인공을 전지전능하게 만들어 독자의 불안감을 낮추고 미지의 고난을 제거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특히 기존 서사에서 악녀 또는 조력자였던 자가 새로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데, 이는 기존에 비주류로 취급되던 인물이 세상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기존 주인공으로부터 남성 인물을 뺏어오는 방식으로 사적 복수를 완수하며, 기존 주인공의 착한 성격은 알고 보니 위선적이었다는 형태로 악녀 또는 조력자였다가 새로 주인공이 된 여성인물과 차별화를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 주인공이 주변 남성인물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애정이다. 애칭을 불러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등 다정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남성 인물은 크게 감동하고 주인공을 위하여 헌신한다. 동시에 전형적 남성성을 가진 인물들의 비(非)남성성이 부각된다. 시대적 특성상 영지전이나 주변국과의 전쟁이 서사의 위기로 등장하므로 필연적으로 남성 인물에게 강한 무력이라는 속성이 부여되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폭력성의 배제와 여성인물을 향한 무해함이 중요한 장점으로 다루어진다. 남장 모티프가 한 줄기를 형성하는 점도 흥미롭다. <홍계월전>, <방한림전>처럼 성별의 격차를 뛰어넘기 위해 위장 모티프를 활용하는 경우는 고전소설부터 로판까지 이어지는 흐름이다.

 

  요컨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고, 그러므로 공격받지 않는 공고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나의 불확실한 지위를 보장받고 싶어 하거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신체적인 열세를 능력으로 극복하고 싶은 욕망같은 것들이 이 장르에 투영되어 있다. 작품에 표면적으로 제시된 주인공은 젊거나 어린 여성이지만, 이러한 수동적 열망은 젊거나 어린 남성, 또는 보다 연령대가 높은 독자층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각 독자층은 나름의 이유로 여주인공이나 그 주변인물에 감정이입할 근거가 있다.

 

  로판이 보여주는 서사는 미성숙하고 비논리적이며 일방향적이다. 그러나 그래서 로판은 사랑받는 것이다. 컨텐츠 산업에 자본이 투자된다는 점 자체로 고무적이기 때문에 이중에 다시 양질의 작품이 나올 것이라는 점도 동의하지만, 작품군에 담긴 사회적 통념이 어떠한 배경에서 등장하였는지 생각해 보며 국내 컨텐츠 산업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하여 다시금 고민해 본다. 남편의 원가족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로판이라는 조합이 한국식 판타지의 전형적인 서사로 자리잡는 것이 최선인지 말이다.

 

  그러니 시장에 나와 있는 로판이 이 스토리에 열광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현실 로맨스로 다룰 수 없는 노골적인 한탄이 판타지의 탈을 쓰고 나왔으나, 다른 세계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세워서 펼쳐야만 하는 서사였으니 이것도 이(異)세계라면 이세계다. 자극적인 서사를 위해 이세계 외주(外注)까지 허용하고 나니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할 자신이 없다. 이 글은 작품을 특정하여 쓰지 않았고, 또한 하위 모티프를 여러 종류 언급하였으나 본격적으로 분류한 것은 아니다. 한국식 장르를 개척하는 로판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와 좌절을 가볍게 정리해본 것이므로 그냥 전반적인 경향을 뭉뚱그려 쓴 글로 읽히기를 바란다.

 

  한편 네이버 웹툰 상위권에 자리한 연령 인증을 요구하는 만화들을 보며, 작년 말 즈음 국내 OTT 플랫폼 왓챠에서 성인관을 별도 편성하여 성인들을 위한 콘텐츠 결제를 손익분기점 달성을 위한 승부수라고 주장한 점을 떠올려 본다. 왓챠 개봉관은 애초에 왓챠가 그리 대형 플랫폼이 아니므로 성인관을 별도 편성할 수 있었지만, 네이버웹툰은 브랜드 가치가 보다 높기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초기 도입시에 연령이 제한된 탭을 별도 편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만 두고 볼 때 여러 만화를 제치고 연령제한 만화가 각 요일 상위권에 자리했고, 이는 해당 작가가 수익을 얻는 것을 넘어서 컨텐츠 플랫폼 입장에서 확실한 수익성을 가진 장르가 하나 더 눈앞에 놓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컨대 왓챠 재팬의 경우처럼 해외 시장에서 ‘현지 업체들과 접촉’하여 ‘보다 적극적인 사업 추진’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점치고 있지는 않을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