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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글 2024/호박 2024

[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 ] 2024. 5. 25. 호박


  얼마 전 인도네시아에 있는 길리 트리왕안이라는 섬으로 여행을 다녀올 일이 있었다. 물빛이 아름답고 파도가 좋아서 서핑이나 스노클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섬이었다. 나는 초등학생 때 이후로 바다에 들어가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원래도 바다에서 나는 동식물 일체를 먹지 못하고, 물비린내도 못 견딘다. 들어가 본 ‘물’이라고는 캐리비안베이가 전부인 내가 해외까지 나가서 바다수영을 한다니, 나는 직접 장비를 끼고 배를 타고 나서서 물로 뛰어들기 전까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적당히 할 만한 경험이라고 기대하던 것도 잠시, 막상 배에서 뛰어내리자 수영은 둘째로 치고 물이라는 공간에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위로 하늘이 높은 만큼 아래로 바다가 깊었다.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시야를 멀리 두자.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리자. 내가 발 디딜 수 없는 땅은 두려운 곳이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나는 맑고 짠 바닷물을 몇 번이고 마셔가면서 알았다.

  수영을 할 줄 몰라서 더 용감했던 모양이다. 여전히 누가 등 떠밀지 않는다면 바다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 내가 그나마 배운 것이라면, 가라앉지 않으려면 최대한 온몸에 힘을 빼야 한다는 사실이다.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몸에 힘을 주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수영의 기본이라니 처음 수영을 배울 때 다들 물에 익숙해지기 위해 오래 시간을 들였을 것이다. 초심자인 나로서는 그 감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름대로 사투를 벌이기를 몇 시간, 조금 마음이 편해져서야 얼추 비슷하게 몸에 힘을 빼는 척을 할 수 있었다.

  글을 쓸 때에도 비슷한 생각이 든다. 좋은 글을 쓰려면 글에서 힘을 빼야 한다는데 그 일이 가장 힘들다. 이 글쓰기 클럽을 처음 시작할 때 솔직한 글을 쓰고 싶었고, 그렇기에 자기언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자기언어라는 이유로 글의 무게는 더 무거워졌다. 대학원 1학년 때 한 민법 교수님은 시험 답안지도 나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쓰는 글이니 본인이 그 내용을 책임질 각오로만 내야 한다고 말하시곤 했다. 꼭 법학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글을 쓰는 사람이 오롯이 글을 감당해야 한다는 부분은 맞는 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밖으로 내보이는 작업은 일종의 고된 자기증명이다. 소재와, 문장과, 흐름의 모든 부분이 그 사람을 보여준다. 그러니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확고할수록 멋진 글 한 편으로 세상에 당당히 내놓을 만한 자기증명을 하고 싶을 것이다.

  이 자기증명을 통해 증명되는 존재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자아는 외부세계에서 타자와의 대립으로 정립되고는 하는데, 내면에도 자아와 자아 아닌 자아가 대립하면서 자아를 규정해간다. 스스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순간 반사적으로 내 안의 타인도 생겨난다. 어려운 책을 읽었다면, 좋은 대학을 나와서 어려운 자격증을 땄다면, 번듯한 직업이 있다면, 똑똑한 사람이라면 ‘어떤 글’을 써야하는 사람이 된다. 그런 글이 아니면 세상에 내보일 수가 없다. 법률서면도 아니고, 학위논문도 아닌데 사적인 글쓰기에서 아무리 힘을 빼야 한다고 해도 ‘전문성’같이 멋있어 보이는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고, 나아가 ‘나’에 대한 집착도 버릴 수 없다.

  솔직한 글이 반드시 내면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묘사를 다양하게 해서 감동적인 글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꾸미지 않고 나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을지가 문제다. 그래서 글에서 힘을 빼려면 어떠한 종류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누구나 자기의 모습이 아니었으면 하는 면모가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종종 어려보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어려운 어휘로 글을 쓰지 않았나. ‘어떤’ 글을 써야 한다는 많은 생각들이 좋은 표현을 막아선다. 종래에는 ‘좋은’ 글이라고 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할지 모른다고. 안전하게 규정된 틀 안에서 논의를 진행할수록 나의 이야기가 없어질 뿐이다.

  자기 안의 타자와 자기를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전체를 보아도 잘 없을 것이다. 정말로 이 둘을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로 성인(聖人)이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므로 조금씩 개인적인 글을 써보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 기어코) 맹자를 인용해 본다. <진심 상 4>에서 “만물이 다 내게 구비되어 있다. 자신을 돌이켜 참될 수 있으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자강불래自强不息 서恕를 실천하는 것이 인仁을 구하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라고 했다. 

  중국철학에서 소위 신비주의라고 하는 만물일체의 경지에 다다르면 개인은 전체와 합일하여 남과 나, 안과 밖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나아간다. 만물이 다 내게 구비되어 있으니 맹자의 말대로라면 나와 만물은 본래 일체다. 본래 일체였던 존재가 그 사이에 어떤 장벽 때문에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면, 이것은 곧 ‘참되지(誠)’ 못한 것이다. 만일 ‘자신을 돌이켜 참될 수 있으면’ 만물과 더불어 일체가 되는 경지를 회복하므로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고 한다. 유가에서 남과 나 사이의 간격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서’의 실천을 제시하는데, ‘서’는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자세다. 즉 남과 나 사이의 간격을 없애는 데에 중점을 두고, 남과 나 사이의 간격이 없어지면 나와 만물은 일체가 될 수 있다.

  갑자기 서(恕)의 실천이 다가온 이유는 타인과 나를 비교선상에 두지 않는 데에서 비로소 나도 나를 정확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나는 서로 비교할 대상이 아니고, 각자가 증명할 상대도 아니며, 그저 동등하다. 맹자의 관점으로 타인의 위치를 나와 동일하게 놓고자 시도하고, 장자의 관점으로 자아를 망각한다. 나의 정체성이 보기 좋은 모습으로만 가득 차지 않았으면 한다. 안전하고 관습적이고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모습은 이미 충분하다. 이래서는 ‘크고 중대한 일’에 대해서만 말하고 나서 정말 글로 남겨야 하는 사소한 문제들을 놓치게 된다.

  그러기 위해 나를 돌아봐야 한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익숙한 곳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지, 이전과 얼마나 다른 글을 쓰고 있는지.

  수영을 마치고, 나는 땅에 발을 딛고서 내가 땅멀미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익숙하지 않았던 바다가 몇 시간 만에 익숙한 공간이 되어서,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오자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바다에서 (수영같은) 위험한 도전을 감행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처음 보는 시야와 새로운 지평, 일탈과 해방감. 노자는 도덕경에서 가장 착한 것이 물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세상 어딘가 존재하는 거대한 물 안에서 나의 자유로움이 곧 자연스러움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가장 개성 있는 것이 가장 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