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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글 2024/호박 2024

[ 100년 동안의 전략 ] 2024. 5. 4. 호박


  <롱 게임>의 저자 러쉬 도시는 바이든 정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국 담당 국장으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을 담당했고, 국가안보회의에서 국가안보회의 인도‧태평양 조정관을 맡은 커트 캠벨과 함께 바이든 행정부 내에서 대중국 강경 대응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 책은 지난 100년 동안 중국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를 대체하기 위한 전략을 <약화-구축-확장>의 순서로 진행시킨 것을 3단계 대전략으로 소개하고 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 방안을 정리하고 있다. 각 단계는 중국 지도부 및 전략가들이 중국과 미국의 힘의 격차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 시기는 미국의 힘이 중국에 비해 월등하므로 ‘능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시기다(1989~2008년). 냉전 시기 동안 중국과 미국은 소련을 공동의 적으로 상정하여 준동맹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사건 무력진압, 1990~1991년 미국 주도의 연합군과 이라크 간 걸프전의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 증명, 1991년 공동의 적이었던 소련 붕괴를 거치며 중국은 미국을 새로운 적으로 인식한다. 이 시기 중국은 조심스럽게 미국 주도 질서를 ‘약화’시키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장기적인 전략을 세운다.
  
  도광양회 시기의 중국은 미국에 비해 뚜렷한 열세였기 때문에 미국의 리더십을 약화시키기 위한 소위 ‘비대칭 전략’을 추구했다. 군사적으로는 비용이 많이 들고 중국에 대한 경계를 높일 수 있는 항공모함 대신, 잠수함, 기뢰 부설, 대함 미사일처럼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들면서 미국이 중국 근해에서 군사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실용적인 무기체계에 주로 투자했다. 외교적으로는 미국 주도로 만들어진 국제기구 안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면서 미국이 국제기구를 활용해 중국을 포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중국은 2000년 항구적인 최혜국 무역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미국이 중국에 경제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이점을 약화하고, 1년 뒤 세계무역기구WTO에도 가입했다. 2세대 덩샤오핑, 3세대 장쩌민 집권기부터 후진타오 집권 1기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 시기는 중국이 아시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적극적으로 성취하다’의 유소작위有所作爲의 시기다(2009~2016년). 중국은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를 미국이 쇠퇴한다는 신호로 보고, 중국과 미국 간 국력 차이가 축소되었다는 결론을 내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에 대한 도전을 시작한다. 군사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스스로 공세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하며, 정치적으로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이 담당한다’는 구호 아래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기구들을 만들어 이전까지는 명칭만 있었던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 등을 강화했다.

  도광양회와 유소작위는 중국공산당의 이념적 용어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둘 사이 관계는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후진타오 집권 2기 이후로 등장하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라’는 외침은 도광양회와 유소작위가 변증법적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핵심적인 사상인데, 변증법적 관계는 보통 두 개의 상반된 개념 또는 힘의 관계를 의미한다. 예컨대 위와 아래는 서로 반대이지만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둘은 변증법적 통일을 구성한다고 한다. 도광양회와 유소작위의 관계가 그렇다. 시진핑 치하에서 이러한 적극유소작위 경향은 더욱 분명해져, 시진핑은 그 어떤 당 연설에서도 도광양회를 전혀 언급하지 않아 마오쩌둥 이후 그 용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 첫 번째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2013년 ‘주변 외교에 관한 회의’에서 기존의 후진타오가 주장하던 적극유소작위를 자신의 대표 문구인 “분발유위(성취를 위한 노력)”으로 전환하였다. 요컨대 도광양회는 초반에는 미국 주도의 봉쇄 위험을 줄이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는 유소작위의 대응체로서 기반만 남아 있고 더 이상 주된 전략이 되지 못하고 있다.

  세 번째 시대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중국식 질서를 ‘확대’하는 시기다(2016년~지금). 2016년 6월 영국이 국민투표로 유럽연합(EU)를 탈퇴하기로 결정하고, 3개월 후 포퓰리즘 운동으로 확고한 지지층을 얻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미국의 힘과 위협에 매우 민감한 중국의 관점에서 이 두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중국은 이를 세계의 가장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그들이 앞장서 만든 국제 질서에서 후퇴하고 있고, 자국을 통치하는 데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중국의 성장하는 힘이 분명해졌고 동시에 서구의 상황은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후 시진핑 주석은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 연설에서 ‘신시대’가 왔음을 선언했다. 코로나 대유행(2020년), 미국 의사당 폭동(2021년) 등을 지켜보며 시진핑은 “시간과 동력은 우리 편에 있다”고 하였고, 중국 지도부와 외교정책 엘리트들은 전략적 초점을 아시아에서 더 넓은 세계와 그 통치 시스템으로 확장할 “역사적 기회의 시대”가 왔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이제 중국은 2049년까지 미국을 넘어서는 세계의 강대국이 되는 것을 목표로 공격적인 정책을 펼친다. 미래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인공지능, 양자컴퓨터, 디지털 화폐, 바이오테크, 5G와 6G 기술에 대한 대규모 투자로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하고, 대만을 무력 통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군사적 능력을 강화하고, 인도‧태평양 지역을 넘어 전 세계에서 중국의 군사력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동아프리카 지부티에 중국 최초의 해외 군 기지를 건설했다.

  뉴요커지 기자 에번 오스노스의 말처럼, 지금 중국은 “미국이 20세기를 형성했던 것처럼 21세기를 형성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의 변화를 주의 깊게 보는 이유는 지금까지 미국이 직면했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도 중국이 큰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요한 징표가 되는 사실이 지난 한 세기가 넘도록 미국의 어떤 적이나 적들의 동맹도 미국 GDP의 60퍼센트에 도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빌헬름 2세 치하의 독일,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제국과 나치 독일을 합한 국력, 경제적 전성기를 맞이했던 소련도 이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은 2014년 조용히 이 선에 도달했다. 동일한 상품의 가격을 동일하게 비교해 환산하면 이미 중국 경제는 미국 경제보다 25퍼센트 더 커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은 지금 뿌리부터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경쟁자임이 경제적으로 분명하다. 이제 중국이 초강대국 지위로 부상하는 것을 미국이 어떻게 다루는지가 21세기의 미중 패권경쟁을 좌우할 것이다. 다가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미국의 주된 정책 방향이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이 책은 지나치게 미국 중심으로 쓴 중국 해설서라는 단점이 있고, 중국의 대전략은 허상일 뿐이라는 반론도 있지만, 최소한 현재 미국의 정치 엘리트들이 보는 중국의 대미국 전략은 그 궤가 유사하고 그들이 보기에 중국몽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롱 게임>의 신뢰성은 중국 당내 회의록과 연설, 보도 등 실증적인 자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을 단순한 개인의 가설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롱 게임>에 앞서 나온 비슷한 책으로 <100년의 마라톤>이 있는데, 전임 국방부 당국자이자 공화당에서 대표적인 중국 전문가로 꼽히는 마이클 필스베리가 쓴 2015년 저서다. <100년의 마라톤> 역시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한 1949년부터 중국이 미국 패권을 무너뜨리고 세계의 패권을 거머쥐기 위한 100년간의 대장정을 펼쳐왔다고 주장한다.

  하버드대 교수 그레이엄 앨리슨은 <롱 게임>을 “중국의 도전과 씨름하는 모든 이가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소개했다. 일본을 분석한 <국화와 칼>처럼 미국에서 분석하는 주변국들에 대한 관점은 항상 참고할 부분이 있었다. 최소한 그들과 국경을 접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중국의 의도와 전략에 대해 이해해야 할 필요성은 크다. 한국은 여전히 분쟁 지역이고 미중갈등의 최전선에 있는 국가다. 우방국이라는 이름은 긴밀한 공조를 나눌 동등한 대상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라면 미국과 중국은 우리의 입장에서 21세기에 가장 중요하게 경계하고 고려해야 하는 두 국가임이 분명하다. 둘 중 누구를 겨냥하더라도 자세하고 정확한 대중국전략에 대한 이해는 선행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현재 미국 행정부의 태도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 책을 참고하기를 추천해 본다.

  저자는 중국식 국제 질서가 현실이 된다면, “한국과 일본에서 미군은 철수하게 되고, 미국의 지역동맹이 끝이 나며, 중국은 자유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권위주의 바람이 강해지는 형식으로 세계질서를 재배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금 시진핑 집권기는 어느덧 3기를 맞이하고 있고 1, 2, 3기의 정책이 모두 중국몽의 대전략을 따르고 있다. 분명한 전략을 가지고 다가오는 상대방에 대하여 우리도 일관되고 합의된 태도로 다양한 패를 준비해 두지 않으면 상대방의 전략에 휩쓸리게 될 뿐이다. 

  앞으로의 10년이 우리의 자리를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큰 외교적 지형에서 균형을 찾아야 우리는 지금의 자리나마 지킬 수 있다. 우리는 백년대계라는 말을 하면서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시간을 가지고 장기적인 계획을 실천할 기회가 부족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와 달리 그럴 인력이나 자원이 부족하지 않고, 충분히 우리만의 대전략을 세울 수 있고 또 세우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외교에서 국내의 여론과 정치적 상황은 항상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주지 않았던가? 그 필요를 잘 읽고 우리에게 적절한 패가 없다면 적절히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적재적소에 있기를 바란다. 말하자면, 지금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백년대계 아닌 십년대계라도 있었더면, 좋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