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성격은 초등학교 6학년 즈음부터 지금까지 큰 변화가 없다. 한창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던 그때쯤에 자아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아직도 내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 유년시절의 기질이다. 이제는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나의 성격은 스스로 평가하기에 까다롭고 모나 보인다. 한 번씩 세상에 내보일까 하다가도 이내 잘 숨겨두기로 한다. 그런 맥락에서 요즘 유용한 사회적 전략 하나를 소개해 본다. 바로 나에게 의견이 없음을 표방하는 것이다.
이청준의 <소문의 벽>에서 소설가 박준은 남북전쟁에서 어머니와 겪은 일을 회상한다. 어린 시절 박준의 고향에 전쟁이 터진 후 한동안 경찰대와 공비가 뒤섞여 마을을 찾아왔는데, 그중 한 명이 집 문을 두드리고 찾아들어 눈앞에 전짓불을 들이밀고 어머니에게 둘 중 누구의 편인지를 묻는다. 잘못된 답을 고르면 바로 목숨을 잃는다. 불빛은 그 뒤에 선 사람의 존재를 가리고, 생명의 기로에서 누군지 모르는 상대가 마음에 들어 할만한 답을 점친다는 것은 존재의 불안을 야기하는 공포다. 이러한 경험은 박준에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어 말하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이상의 <오감도 시제1호>를 보자. 열세 명의 아이가 무섭다고 하며 도로를 질주한다는 내용이다. 도로는 막다른 골목이든 뚫린 골목이든 무방하다고 한다. 어떤 길이 있는데 그 길이 막힌 길인지 어딘가로 이어진 길인지는 모른다. 그렇다면 그 답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의 길을 선택해서 끝까지 뛰어가 보고, 길이 막혀 있으면 포기하고 다시 다른 도로를 선택해서 끝까지 뛰어가 보는 것이다. 그런 도로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이미 미로다. 미로에는 분명 출구가 있지만, 출구의 위치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까마귀의 눈에서나 보이지 미로 안에서 뛰는 사람들의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열세 명 아이들은 ‘무서운 아해, 무서워하는 아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중 몇이 정말 무서운 아이고 나머지 몇이 무서운 아이를 보고 무섭다고 말하는 아이인지 알 수 없다. 어느 순간 한 명이라도 옆을 보고 무섭다고 소리를 지르면, 그 옆 아이도 같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다가 이내 열세 명이 모두 소리를 지르며 달리게 되었을 것이다. 설령 그 안에 무서운 아이가 실제로는 한 명도 없었을지라도 말이다. 서로 정체를 모르는 상황에서 공포는 쉽게 전염된다.
공포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혼재된 상태로 있는지 모를 출구를 찾아 미로를 질주하는 것이 최후의 모더니스트 이상에게 보인 당시 현대사회의 모습이다. 삶의 영역이 도시, 나아가 국가로 확장되면서 우리는 60만 명이라는 거대한 숫자를 마치 옆동네 주민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그 한명 한명을 알지 못하기에 그들은 나의 친구이자 적이다. 매일 인스타그램에 글을 쓸 때, 누군가의 카카오톡에 답장할 때, 업무용 이메일을 조심스럽게 써내려갈 때 나는 전짓불의 공포를 떠올린다. 친구인지 적일지 모를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고민하는 것은 어렵다.
뚜렷한 의견없음은 상대방에게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다’를 보여주는 방식이지만, 결국 중립지대란 허상임을 알고 있다. 종국에는 나도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견을 밝히지 않는 모습은 나의 정체성을 가리고, 동시에 ‘큰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무서운 아이가 되어갈 것이다. 생각의 스펙트럼에서 양와 음이 있다고 할 때, 0은 같은 값의 양수와 음수의 대칭되는 조합이 적절히 조화될 때(예컨대 –2와 +2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적당히 표방되는 것이지 그 자체로 0의 값을 가지는 사람을 아직까지는 보지 못했다. 누군가는 이 공포의 전염을 끊고 막다른 도로를 질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는 아이가 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게 내가 될 수 있다면, 나는 평생 어른이 되지 못하는 걸까?
눈부시게 밝은 불빛에 반응하던 마음은 어느새 모든 빛에 반응하게 되어 간다. 보이지 않는 벽은 그만큼 두껍고 단단하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존재도 참 희미한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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