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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글 2024/호박 2024

[ 요즘 표현 ] 2024. 4. 13. 호박

 

  한 인기 있는 유튜브 채널의 영상에서 이런 농담을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을 ‘돌려막기’ 한다는 것이다. 잘 그린 그림을 보면 사진같다고 하고, 사진이 너무 잘 찍히면 그림같다고 한다. 맛있는 음식을 하는 식당에 가면 참 집밥같다고 하고, 집에서 하는 음식이 맛있으면 식당에서 사 먹는 것 같다고 한다. 사람이 예쁘면 그 사람 참 인형같다고 하고, 예쁜 인형에는 진짜 사람같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우스운 이 농담을 듣고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우선 본질에 가까운 것이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림-사진, 인형-사람, 집밥-식당’의 대칭관계는 개념상 정반대는 아닌 대응인데, 요지는 A에게 ‘A같지 않음’의 속성이 부여된 것을 칭찬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칭찬이 ‘흔하거나 평범하지 않고 특별함’이라는 의미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본질에서 멀어질수록 특별해진다는 것도 우습다. 전형성과 보편성을 잃어버릴수록 더 좋은 상태가 된다는 것은 참 묘한데, 칭찬의 본질이 상대방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집밥이 집밥에서 멀어질수록 더 특별해지고 듣는 상대로 하여금 기분이 좋아지도록 한다는 점은 우리 사회에서 그 이름에 걸맞은 상태에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되돌아보게 한다.

 

  이것이 정말 위의 몇 가지 예시에만 적용되는 것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내심 있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유독 한국 사회는 자기부정이 심하다. 분명 자신을 나타내는 명칭임에도 해당 명칭으로 규정되는 것을 기분 나빠한다. 학생에게 ‘참 학생같다’라고 말하는 것, 회사원에게 ‘참 회사원같다’라고 말하는 것, 나이 든 사람에게 ‘참 나이 드신 분 같다’라고 말하는 것, 어린이에게 ‘참 어린 아이같다’라고 말하는 것 중 어느 하나 오해 없이 순수한 칭찬으로 받아들여질 것이 없다. 이는 단순히 틀에 갇히거나 고정된 명칭을 거부하는 정체성 논쟁이 아니다. 오랫동안 유교를 숭상한 국가였으면서도 이름에 맞게 살아갈 것을 외치는 정명(正名)은 우리 사회에 없는 모양이다. 보편적 특성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은밀한 현실부정과 추구되지 않는 이상의 불균형이 내면에 극도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전형적인 한국인이라고 하는 말도 듣기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아마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앞으로도 한동안 높아지기 어려울 것이다.

 

  화제를 바꾸어 두 번째는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s) 개념이다. 태초에 우리는 말을 어떤 식으로 배웠을까? 사과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빨간 과일이라는 단어를 알아야 하고, 과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과, 바나나, 수박을 알거나 예컨대 채소라는 단어를 알아야 한다.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어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태어난 이후부터 우리는 원래도 말을 돌려막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려막기를 하려면 뭐든 가장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인식된 단어가 있을 텐데, 돌려막지 않고 그 단어의 의미가 이해된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비트겐슈타인이 하는 설명은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이 비슷한 쓰임을 가지고 마치 가족처럼 묶여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언어를 놀이로 보았는데, ‘가위바위보’, ‘술래잡기’같은 단어들을 묶어서 보면 비슷한 쓰임을 가진 단어들의 의미가 큰 단위에서 인지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 의하면 우리는 단어와 의미를 하나씩 본질로 연결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닮은 것처럼 여러 단어를 묶어서 유사성 단위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원래 말은 돌려막는 것이 맞다. 과일을 설명해보면 채소가 아닌 것이고 채소는 과일이 아닌 것이다. 잘 만든 농담은 꽤 철학적인 것일지도, 뛰어난 철학은 결국 농담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