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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글 2024/구름 2024

[ 4. 자기개발 활동의 사치성 ] 2024. 5. 11. 구름


가. 인간의 생산성 개발 문제는 생존의 문제와 같다.

 여자와 어린 아이가 인간으로서 성인 남성과 동등한 카테고리에 있다고 받아들여진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에서 농업보다는 공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하게 됨에 따라 여자들도 얼마든지 큰 폭으로 생산성에 기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기술의 고도성에 발 맞추어 어린아이들의 적은 힘을 사용하기보다는 충분히 교육하여서 기술산업에 투입할 수 있게 된 것이고 말이다. 단순히 인권선언 하나가 쓰인다고 해서 인류의 태도는 쉬이 바뀌지 않는다. 다만 의식주를 기초로 하는 우리의 생활 환경이 달라졌기에 인간들은 그에 적응하였을 따름이다.
 전문화된 기계의 힘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인간의 ‘능력’ 개발이 더 중시된다. 이 사회는 막대한 부를 창출해야 하는 기업(및 개인들)으로 이루어지며, 기업들은 부가가치가 크고 가격이 매우 높은 상품을 독점적으로 판매하고자 한다. 이미 인간의 단순 노동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기계나 기술을 이용한 상품 또는 용역을 판매하면서, 그 판매와 관련하여 (아직은) 인간이 담당해야 하는 분야가 있다면, 그 분야에서 인간을 분별하는 지표는 더 이상 근력만은 아니다. 인간이 담당해야 하는 생산적 역할에 있어서 그 능력을 줄세우는 척도를 ‘생산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생산성’에는 이런 저런 복합적인 요인들이 포함되며, 기업마다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모습이 다르다. 결국 인간의 ‘생산성’은 기계의 ‘생산성’에서 확대된 개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성은 개개인의 생활수준 및 의식주를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생산성은 고용주의 요구수준이나 급여 등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인이 되므로, 이 사회의 대부분의 실제적, 잠재적 구직자들은 나의 생산성, 나의 능력 개발에 힘을 쓰고 있다. 한편, 이러한 생산성 내지 능력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의 상대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남의 생산성, 남의 능력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SNS가 사회인 간 소통과 뉴스 전달의 매개체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서, 좋든 싫든 남의 생산성, 남의 능력, 남의 생활수준을 속속들이 확인하게 되었다. 주식장에서 특정 회사의 주가를 매일같이 확인하듯이, 이 사회의 인간들도 남들과 생활 수준, 급여 수준 따위를 실시간으로 견주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앞서 ‘생산성’이 기계에서 인간으로 확장되었다고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시장’도 상품에서 인간으로 확장되었다.
 인간은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동물로서, 생존에 대한 관심이 막대하다는 것이 나의 평소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와 타인의 생산성에 대한 관심이 생존에 대한 관심의 일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근래 인간이 다른 인간을 볼 때 생산성 측면에서 평가하는 것은 상대적인 생산성의 우위를 가지고 의식주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려는 것이 주요한 동기가 아닐까 한다.

 


나. 현대사회에서 최고의 생산성을 지니지 않으면 문제인가?

 타인에 비하여 높은 생산성을 지니는 것이 생존의 한 가지 법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의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최고의 생산성을 지니지 않으면 문제인가? 최악의 생산성을 지닌다면 어떻게 되는가?
 최고의 생산성을 지니지 않으면 문제인가? 대부분이 ‘아니다’고 대답하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현실 속 개개인의 체감은 다른 차원이다. 실제로 많은 청년들은 타인에 비하여 생산성이 뒤떨어진다고 느껴지면 취업과 생활유지에 대한 불안을 피하지 못한다. 한국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서울에 극도로 집중되어 있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자리는 경기불황까지 겹쳐 매우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생산성의 비교는 눈 앞에 닥친 현실생활의 걱정과 불안으로 다가올 수 있다.
 최악의 생산성을 지니면 어떻게 되는가? 이 또한 실제 현실 사례를 들어볼 수 있다. 나보다 앞서서 태어나 앞선 시대를 살고 앞서서 늙은 분들이 있다. (예외는 있지만) 인간은 노화에 따라서 생산성을 잃는 법칙이 있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은 한강의 기적과 그에 걸맞은 인플레이션까지 급속도로 일어났다. 노후대비를 할 당시의 물가수준 및 화폐가치는 천지개벽을 겪었다. 이제 와서 기업에서 고강도의 노동을 한다든가, 전자기기를 사용하여 복잡한 업무를 할 것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위의 경우 사회 안전망으로서의 국가적 제도가 일정 정도 구비되기는 하겠지만, 그보다도 개인의 생활방식이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예상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의존이 낮은 생활방식을 영위하거나, 도시지역을 벗어나서 낮은 물가가 유지되는 지역에서 살거나, 마을 공동체 단위의 협력으로 상부상조하여 사는 등의 대안이 필요하다.

 


다. 세계의 모든 곳의 환경이 현대 산업사회인 것은 아니다.

 “개인이 잘나서 높은 급여를 받고 좋은 집에 살고…” 서울에서도 뭇매 맞을 소리지만, 눈을 더 크게 뜨고 귀를 더 크게 열어본다면. 우리는 70억 명의 인간들과 함께 이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깨끗한 물이 없고, 기본적인 치료약이 없고, 다닐 학교가 적고, 먹을 음식이 부족해서 사람이 굶을 수도 있다. 사실 지구 반대편이 아니라 분단선 바로 위의 동포들이 그렇게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국가, 지역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도 평등하지 않다. 전쟁을 겪고, 강대국에 침략당하고 약탈당하며, 지진, 홍수, 가뭄 등 자연재해가 휩쓸고 지나가고, 수익을 창출할 자본을 쥐려야 쥘 수 없는 국가적 환경에 놓여 있는 나라들도 많다. 의식주의 문제가 생산성에 달려있지 않다. 이런 경우에 생존은 국가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라. 그래서 나는 어째야 하는 것인가? 먼 나라 인간 개체들에 대한 의무의 문제로 변화한다.

 나의 도덕적 의무에 관하여 고찰하기 위하여 글을 썼다. 자기개발을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사치이지 않은가 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지구상의 다른 사람들이 의식주를 위협받는 상황에서 이를 상관하지 않고, 그저 서울에서 생산성을 겨루는 삶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볼 수 있는가? 바람직한 삶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어떤 도덕적 의무가 있는가? 도덕적 의무란 무엇이고, 도덕적 의무는 모두 지켜야만 하는 것인가?

 


마.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의무의 문제는 계속 고민하여야 한다.

 부끄럽게도 도덕적 의무란 무엇이고, 지구상 다른 인간들의 의식주를 위협받는 상황에서 나에게 어떠한 의무가 있는지에 대하여 아직 생각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또 훌륭한 철학자들이 이미 세상에 내어놓은 대답들을 몇 개 읽어 보지도 못하였다.
 내가 글을 쓰면서 세상에 대해 고찰하려던 것은 이렇게 힘없이 주저앉아서 나의 무지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던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러니 이렇게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것은 앞으로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공부하겠다는 약속을 쓰고자 함이다. 읽지도 않고, 공부하지도 않고, 글을 쓰기만 하는 것을 싫어한다던 어느 유식자 친구의 말을 떠올려 나에게 입혀본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오늘도 공수표를 쓰고 공부하겠다고 다짐한다. (이 유복한 사회에서 온갖 윤택한 생활을 누려오면서 큰 갈등없이 자란 나의 입에서 뱉는 말은 별로 신빙성이 없지만,) 인간 내면의 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다고 믿는다. 어떤 이가 그의 죄, 상처, 혼란, 어려움 등을 알지만, 알면서도 계속 걸어간다면 그 길의 끝엔 다른 사람들이 쉬이 도착할 수 없는 곳이 나오리라고 말이다.} 부끄러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