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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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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라밸에 있어서, 생활의 정의 ] 2024. 7. 13. 구름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대학교 수업시간에서였다. 경영대 교수님이 “요새 워라밸이라는 말을 쓴다지요?”하면서 워라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게 처음 들은 거였다. 비록 수 년 전 일이지만 나는 그 때가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꽤 시니컬한 스피릿이 있는 영혼이라… ‘work life balance를 워라밸이라고 하다니… 별 걸 다 줄여서 해괴한 언어를 만든다’며 그걸 인용하는 교수님까지도 못미더워했다. 저런 이상한 단어 곧 사라져서 두 번 다시 안 듣게 될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그리고 다시 현재… 워라밸 붕괴라는 것은 일과 생활이 분리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특히 나의 직장이 근로시간을 포괄적으로 정하고 근로시간과 상관없이 연봉을 책정하는 제도로 되어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
[ 기억할 만한 하루: 미국식 파티 주최자 J의 피곤한 얼굴 ] 2024. 7. 7. 구름 ‘다시는 미국식 파티에 한국인을 초대하지 않겠어…’ 씩씩거리는 J의 목소리로 사교의 장이 끝났다. 서로 잘 아는 학부 친구들 5명에, 잘 모르는 대학원 사람들 3명을 끼워서 만든 술자리였다. J는 이 파티는 망했다며 분해했지만, 어쨌든 초대받은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썩 성공적인 자리였다. 다들 자유롭게 술을 마시거나 마시지 않았고, 데면데면하면서도 화기애애하기는 했다.  이 자리에는 상당한 개성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상형이 이적인 여성과, 이적을 닮았고 코랄색과 아메랄드색을 좋아하는 남성과, 석박사 통합과정을 밟고 있는 남성과, 조용히 앉아있다가 계산을 해버리고 간 쾌녀와, 세꼬시를 많이 먹어서 배가 답답하다고 원피스 지퍼를 내려서 등이 파이는 원피스로 만들어버린 여성과, 전날밤 친구집에서 브이로그 ..
[ 사랑에 대한 단상-2 ] 2024. 7. 6. 호박 데이먼스 이어(Demons year)는 이름의 말장난만큼 흥미로운 가사를 쓴다. 누가 가사를 쓰는지 모르지만 꽤 공을 들이는 것 같다.   2020년에 싱글로 발매된 앨범 에 수록된 앨범명과 같은 이름의 곡을 최근 자주 듣는다. Rainbow는 2021년에 발매된 정규 앨범 에도 수록되었는데, 이때는 도입부에 다른 반주가 깔린다. 2020년 버전으로 들어야 시작할 때 배경에 나오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다. 조용한 곳에서 노래를 듣지 않으면 피아노 소리를 노래의 시작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새벽이나 밤늦게, 혼자 방 안에서 들으라는 모양이다.    노래가 시작하자마자 화자는 ‘내가 바랐던 건 그대가 아니’라고 한다. 그럼 화자는 ‘그대’를 싫어하는 걸까? 우리는 좋아하는 대상을 만나기 전까지 그 사람이 누구..
[ 변화의 방식 ] 2024. 6. 30. 호박 (1) 체벌을 통해 반사회적 행동이 교정된다고 해 보자. 수용자가 배우는 것은 그 행동의 의미가 아니다. 아픔을 통해서 행동이 변한다면 이는 폭력에 대한 순응이다. 그 과정에서 ‘나를 때릴 수 있는 사람’ 앞에서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배운다. 그렇다면 나를 때릴 수 없는 사람 앞에서 같은 행동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없어진다. 내가 행동을 가려야 하는 강한 사람과, 행동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약한 사람을 구별하는 경험이 점차 학습되어 하나의 행동양식으로 자리 잡는다.   체벌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바꾸기 위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이렇게 쉬운 방법을 선택할 것이라면 구태여 왜 교육이라는 말을 쓸까? 그것은 이미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다. 학교가 사회생활을 배우는 장소라면,..
[ 뭔지 모르겠으니 공부하자 ] 2024. 6. 22. 구름 나의 존경받는 직장 상사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총명하고 식견이 넓으시다.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 하시냐 여쭈어 보니, 업무적으로 볼 일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NPR(내셔널 퍼블릭 라디오) 뉴스를 한시간 반씩 들으신단다… 징글징글하다 생각하고 고개를 젓게 되었다. 천재들이 더 공부를 많이 한다. 또다른 높으신 직장 상사분들과 나눈 대화는 이렇다. 문서를 정확하고 빠르게 한 번 읽을 때 제대로 읽으면 좋지 않으냐고 말씀드렸는데, 아- 아니라고 하신다. 과장 좀 보태서 자신은 100번까지 읽을 때도 있고,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도가 높아지는 건 당연한 거라면서, 많이 읽는 것을 추천하셨다. 오래, 많이 붙잡고 있는 게 좋다는 것이다.돌아돌아 우연히 도달한 나의 직장이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
[ 사람찾기 ] 2024. 6. 16. 구름 MBTI는 좋은 화제거리이다. 서로 할 말이 없을 때 상대방에 대한 친근감을 표시하는 계기가 되고 성격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게 된다. 운이 좋으면 그 사람과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빠르게 상대방의 취향, 취미, 생각 등을 예상해볼 수도 있다. 원래 친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를 이어 나가고 그 결과로 그 사람과 친분을 쌓기 시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공통된 화제거리가 없고 대화에서 할 말을 찾지 못하는데도 친분이 쌓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직장에서 계속 보게 되거나, 서로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이미 질문이 있는 상태이거나, 아주 특별한 순간을 공유한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그런 접점이 전혀 없다면 말이다. 요컨대 사람들 간의 대화는 원래 어렵다. 어떻게 말문..
[ 등 위의 잠 ] 2024. 6. 15. 호박 동현이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평범한 사춘기 소년의 고민과는 다르다. 이질적인 이방인으로서 겪는 소외감이 근원에 있기 때문이다. 주위는 온통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인데, 거울만 보면 남과 다른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가 보인다. 김밥 김도 쳐다보고 싶지 않던 ‘라이스보이’에게 “한국인은 밥심”을 외치는 엄마 소영은 그 애정만큼이나 자신의 정상성을 위협하는 존재다.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엇나가는 아들에 속이 상해 정처없이 걸어 숲으로 끝없이 들어가던 소영의 작은 뒷모습도, 소중한 엄마에게 화를 내고 울면서 철조망 다리를 지나 학교에 가던 동현의 옆모습도 둘 중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문화와 인종의 경계에서 소속감을 잃은 이민 2세대 아동의 긴장과 불안은 자신의 뿌리가 되는 문화를 부정하고 편입되려..
[ 사랑에 대한 단상-1 ] 2024. 6. 9. 호박 내가 교과서로 삼고 있는 책은 에리히 프롬의 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은 지도 벌써 10년 즈음이 된다. 오래된 책이어서 문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절이 많지만, 다만 누군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말할 때 내가 생각하게 되는 ‘정답같은’ 모습이 이 책에서 나온 것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건 상대방의 온전한 성장을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사랑은 마치 식물을 키우는 것처럼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커 가길 바라며, 그 성장을 함께 응원해주는 마음이다. 식물이 자라는 토양에 물을 주지 않고 이파리를 마르게 한다면 그 식물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프롬은 책의 제목을 정하면서 Love가 아닌 Loving고 표현했다. 그러니 프롬이 의도한 바대로라..